그리스도의 레지오 수도회
Untitled Document
home location
Untitled Document
 
[수도회] 하느님께서는 왜 하필 저를 살려주셨나요?
  글쓴이 : 그리스도의 레지오 수도회    날짜 : 11-05-27 16:05     조회 : 2,699
 


하느님께서는 왜 하필 저를 살려주셨나요?

찬민딘 신부(Fr. Chan Minh Dinh, LC : 베트남)

사제소명은 겨자씨처럼 작은 씨앗으로 뿌려져, 가족들이 주는 물과 가지치기, 본당활동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저는 아홉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제가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많은 식구의 가장이 된 어머니는 헌신적으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어머니는 새벽 4시 반이면 우리를 깨워 5시 미사에 데리고 가셨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 형제들은 집에 돌아와 다시 잠에 곯아 떨어지곤 했습니다. 그리고 오후에는 본당에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기를 바랐습니다. 베트남에는 가톨릭 신자가 10%에 지나지 않지만, 제가 자란 마을은 1960년대에 북 베트남 공산정권에서 탈출한 가톨릭 신자들의 가족과 지인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에 99.9%가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그들은 전쟁의 상흔을 딛고 마을을 세우고 가꾸었습니다. 제 어린 시절은 추억으로 가득합니다. 장난감을 만들며 뛰놀기도 했지만,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성금요일의 ‘십자가 경배예절’과 같은 가톨릭의 아름다운 전통에 참례했습니다.


모험

1983년 6살 되던 해, 맏형이 대도시로 배를 사러 가는 길에 저를 데리고 갔습니다. (결국 형은 거기서 산 배로 베트남을 탈출했습니다.) 사실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곳을 구경하고 싶었기 때문에 제가 졸랐던 것입니다. 난생 처음으로 시장이며 가게들, 자동차와 버스, 트럭, 그리고 신기한 장난감들을 접하고 구경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머무는 동안 양팔과 다리가 없는 젊은이가 거리를 기어 다니며 동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연약한 하반신 피부는 벌겋게 충혈되다 못해 노면에 쓸려 거의 피가 날 지경이었습니다. 가난하고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을 본 적이 없던 저는 그가 너무도 가여웠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도 그 고통스러운 장면은 되살아났고, 차차 마음 속 깊이 숭고한 이상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저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부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8살이 되던 해, 학교에서 돌아온 저에게 어머니는 “네 형과 누나들이 보고 싶지 않냐?”고 물었습니다. 형제들이 배를 타고 베트남을 탈출한지 2년이나 되었기 때문에 몹시 그리웠습니다.

그들은 안전하게 인도네시아에 도착한 다음 미국으로 망명해 캔자스(Kansas) 주의 서남부 다지(Dodge) 시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모험에 설레었고, 무엇보다 형제들이 너무나 보고 싶었던 저는 어머니의 제안에 주저 없이 “가겠어요”하고 대답했습니다.

이제, 1970년대부터 80년, 90년대까지 수 천명의 베트남 사람들이 자유와 기회를 찾아 조국을 탈출한 이유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베트남은 주로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만들어진 할리우드 영화나 다큐멘터리 덕분에 잘 알려져 있습니다. 베트남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간의 갈등으로 분단되었습니다. 제가 자라던 마을에서는 15세에서 35세 사이의 남자들은 모조리 징집되었기 때문에 형들은 경찰이 지날 때 마다 숨어야 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돌아오지 못했고, 살았더라도 팔 다리가 성한 채로는 돌아올 수 없었기 때문에 군대에 징집된다는 사실은 소름 끼치는 일이었습니다. 경찰은 물자도 징발해 가서, 어머니는 여러 번 땅을 파고 귀중품과 비상식량을 숨겨 두어야 했습니다. 이웃한 학교는 5학년까지만 운영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장래를 위해 스스로 논에 나가 일했습니다. 가톨릭 신자로서 자유롭게 미사에 참례할 수도 없었습니다. 본당 사제가 교구에서 해야 할 주요 활동조차 허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이런 어려움에서 벗어나려고 많은 베트남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탈출했습니다. 걸어서 라오스와 캄보디아로 향하거나 작은 고깃배를 타고 태국, 홍콩, 필리핀, 말레이시아, 아니면 인도네시아로 갔습니다. 변변한 설비는커녕 모터도 없는 배에 심지어 나침반조차 없이, 폭풍우와 해적들에게 시달리는 위험천만한 여행이었습니다. 저희 가족도 이 행렬에 끼어 있었으며, 친척 15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해변이나 수영장, 호수를 볼 때마다 당시의 여정을 돌이키며 하느님께 여쭈었습니다. “하필, 왜 저를 살려주셨나요? 저를 통해 무슨 계획을 세우셨나요?” 베트남 탈출 여정은 너무나 위험했기 때문에 어머니는 우리를 세 그룹으로 나누었습니다. 헤어진 지 5년 만에야 비로소 우리 가족은 캔자스 주 다지 시에서 다시 합칠 수 있었습니다. 처음 몇 달 동안은 지역 공동체 수녀님들이 여러모로 도와주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도록 세심하게 보살펴 주신 수녀님들과 다지 시의 공동체들, 그리고 정부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성모님께 건 내기

고교 졸업을 앞두고 저는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장차 무엇을 하면 좋을까? 하느님께서는 날 위해 어떤 계획을 세우셨을까? 취직해서 결혼하는 길과 사제의 길을 두고 고민에 빠졌습니다. 저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회피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사람들 앞에서 말도 제대로 할 줄도 모르고 어떻게 가르쳐야 할 지도 모르니, 자질이 없다고 하느님께 말씀 드렸습니다. 저는 혼자서만 소명의 비밀을 간직하고 어머니에게 조차 말하지 않았습니다.

혼자 집에 있던 어느 날 파티마의 성모님께 내기를 걸듯 기도했습니다. “성모님! 제게 사제소명이 있다면 간단한 표지라도 주세요. 당신이 쓰신 왕관에 박힌 다섯 개의 다이아몬드 중 붉은 다이아몬드가 앞을 향하면 당신 아드님께서 저를 부르시는 줄 알고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일을 잊었고, 며칠 후 다시 집에서 혼자 있는 틈을 타, 똑같은 성모상 앞에서 전과 비슷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성모님께서 전보다 더 기쁜 얼굴로 저를 향해 왕관의 붉은 다이아몬드를 강렬하게 비추시는 것을 보고는, 무릎을 쳤습니다. “당신 아드님께서 저를 부르시는군요! 이제 약속을 지켜야겠네요.” 그러나 이번에도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서 첫 학기를 마치고 다시 진로를 고민하던 저는 수학 교사가 되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스페인어 교수님이 저에게 “돈벌이로 교직을 택해서는 안 된다. 많은 생명을 고유한 존재로 키워내겠다는 각오로 투신해야 한다”고 조언했고, 많은 존재 중 하나인 저에게도 고유한 길을 갈 수 있는 격려로 들렸습니다. 결혼도 하고 학생들도 도울 수 있는 직업을 갖기로 결심하고 나니 정말 행복했습니다.

2학년이 되어 학기 초부터 중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쳤습니다. 학생들에게 힘이 되어준다는 생각에 즐겁게 일했습니다. 게다가 이 일은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능력을 연마할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어떤 학생은 시간표 조차 몰랐고, 가정환경 탓에 생활을 자율적으로 조절할 줄 모르는 아이들도 많았습니다. 저는 이런 직업을 택해서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성모님께 건 내기를 깬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했습니다.

수학을 전공해서 학위를 마치고 나면 결혼해서 가정을 갖겠다고 결심하고 나니, 여느 때처럼 편안했습니다. 그러나 부르심은 거두어지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를 도울 생각으로 집안 청소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차곡차곡 모아둔 고물 ‘돈 깡통’을 아무 생각 없이 잡동사니와 함께 내다 버리고 만 것입니다. 공산정권 하에서 귀중품이나 돈은 무조건 숨겨두던 습관이 남아, 은행을 믿고 맡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저에게 돈을 찾아오라고는 하지 않았지만, 고통과 슬픔이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다음 날 미사에 참례했는데, 그날의 복음말씀이 바로 부자청년이야기(마르코 10:17-31)였습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가 모은 돈을 내다 버린 사건의 정곡을 찌르는 복음 말씀에 저는 하느님께서 저를 부르고 계시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어머니께, 이제까지 저를 사제로 부르고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어머니도 제 결정을 지지해 주셨습니다.


첫 체험

어머니께 말씀 드린 다음으로 해야 할 도전과제는 신학교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3년 동안 본당에서 청년그룹 리더로 활동했었기 때문에 많은 신부님과 수녀님, 신앙공동체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저를 수도회나 신학교로 초대해 주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성소 식별과정도 알지 못했습니다.

어느 더운 여름 날, 우리 본당 청년그룹 리더인 마리 휴(Mary Hiu)가, 사제소명에 뜻을 둔 청소년들이 볼 수 있도록, ‘르 크리스토(LeCristo: 미국과 캐나다에서 그리스도의 레지오 수도회가 발행하는 소식지)’의 과월호를 가져왔습니다. 그는 잡지를 테이블 위에 두고는 야구를 하러 나갔습니다. 저는 무심코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는데, 사제서품을 받은 27명 젊은이들의 사진이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사제는 하느님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직무를 함께 한다’는 표제가 열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처음으로 사제 직분이 갖는 의미를 조금이나마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사제의 직무와 도전과 모험 과제에 매료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수사 수련기간이라도 알아보려면 체셔(Cheshire)로 전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2주일 동안 여섯 번이나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실망감에 급기야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해 보자”고 되뇌며 앞으로는 사제가 되겠다는 생각일랑 영원히 떨쳐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통화는 이루어졌고 실망은 희망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후, L.A.지역에서 사목하는 그리스도의 레지오 수도회 신부님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성탄시기 동안 체셔에서 열리는 성소를 살피는 피정에 참석하라는 초대의 말씀이었습니다. 마침 어머니는 딸 넷 중 막내딸을 보스톤으로 시집 보내고는 몹시 보고 싶어했기 때문에, 피정 떠나는 길에 모시고 가겠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이내 찬성했고 로스앤젤레스 공항에서 누나 부부에게 어머니의 출발을 알리면서, “나는 나중에 들릴 테니, 이번엔 피정 장소인 체셔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렇게 크리스마스 이브에 체셔에 도착한 저는 근사한 저녁식사를 하고, 드디어 신학생들에게 궁금증 보따리를 풀어냈습니다. 그들은 평범했지만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신학교 생활에 대해 말해 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지루하고 재미없던 지난 몇 해간의 일이 스쳐갔습니다. 신학생들과 개인적인 만남을 갖고 보니, 제가 갖지 못한 점들이 더 크게 와 닿았습니다. 그들은 잘 먹고 열심히 일하고, 뜨겁게 기도하면서 지루한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자 “이들이 해낸다면, 나도 할 수 있다”라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집에 온 것처럼 편안해 졌습니다. 그러나, 대학 졸업까지는 아직 1년이 남아 있었습니다.

저를 체셔에서 피정하도록 초대해 주신 신부님은 사제 수련기에 들어가기 전에 수학 학사학위를 마치라고 권유했습니다. 이듬해 봄 졸업을 하고 제가 무엇을 가르칠지는, 하느님께 결정권을 내어 드리기로 했습니다. 그 해에 저는 생애 최고의 여름을 맞았습니다. 많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고, 새로운 곳들을 구경했습니다. 신학교에서의 생활은, 스포츠와 함께 구성된 수업, 지정된 기도시간과 매일 미사, 묵주기도, 주간고해성사, 영적 지도, 가정방문전도, 심지어 마라톤에 이르기까지 모든  프로그램에 흡족했습니다. 프로그램 말미에 이루어진 8일간의 침묵피정을 통한 이냐시오 영성수련은 하느님을 더 잘 알고, 내 삶을 두고 세우신 계획을 발견하며, 나를 더 잘 알 수 있게 한 귀중한 체험이었습니다. 마지막 날 저는 수도회의 제복을 받았습니다. 피정 후에는 하느님께서 저를 그리스도의 레지오 수도회 회로 부르고 계심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전의 생활방식 대신 하느님의 뜻에 맞추는 삶에 적응하기까지 처음 몇 개월간은 더 큰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방식과 사람을 사용하시는 방식은 하느님의 논리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제 인간적인 노력은 하느님의 뜻과 연합했을 때 비로소 가치를 발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성장배경과 국적의 신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고 살아가는 데에도 익숙해져야 했습니다. 그것은 매우 가톨릭적인 폭넓은 경험이었습니다. 모든 하느님의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임무를 수행하기에 앞서, 훈련하기에는 더 없이 풍성한 환경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행복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시고, 영혼을 천국으로 이끄시는 그리스도의 길을 향해 갈 수 있도록 저를 선택하고 불러주신 하느님께 감사 드리며 저는 진정으로 행복을 느낍니다.  11년의 수련기를 마치고도 공식석상에 설 때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그저 평범한 청년입니다. 저에게 복음말씀은 여전히 함께 나누고, 널리 전해야 할 보물입니다. 저 혼자서는 그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제로서의 저는 그리스도라는 귀중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저는 늘 활동적이었고 모험을 즐깁니다. 그리스도의 병사가 되고 나서는 보다 더 패기 있게 살고 있습니다. 포르투갈어 한마디 할 줄 모르고도 브라질에 파견되었을 때처럼 언제, 어떤 임무가 주어지든 나설 준비를 해야 하니까요.

저는 하루하루 새롭게, 삶의 목적과 하느님께서 제 삶을 붙들어 주신 이유를 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말씀처럼. “이제 사제가 되는 기막히게 멋진 순간을 맞았습니다!”


찬민딘 신부(Fr. CHAN MINH DINH)는 1977년 1월 10일 베트남 락기아(Rach Gia) 킨(Kinh) 5A에서 태어났다. 1995년 존마샬(John Marshall)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99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리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California State University of Los Angeles)에서 수학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나서, 1999년 9월 15일 코네티컷(Connecticut) 주 체셔에서 그리스도의 레지오 수도회 수련자로 입회했다. 그 곳에서 2002년에서 2005년까지 인문학을 공부한 후, 브라질에서 청년사목을 수행했다. 2005년에서 2007년까지 쏜우드(Thornwood)와 뉴욕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2007년부터 2009년까지 로마의 교황립 사도들의 모후 대학 (the Pontifical Regina Apostolorum College)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2009년에는 브라질 상파울루(Sao Paulo) 소재 LC신학교(the Legionaries’ seminary in to the Humanist)에서 교육 팀의 일원으로 일했다. 그는 현재 브라질 쿠리치바(Curitiba)에서 신학교 고교과정의 교감 직을 맡고 있다.


 
   
 

Untitled Docu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