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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하느님의 연약하심
  글쓴이 : 그리스도의 레지오 수도회    날짜 : 11-04-07 16:17     조회 : 5,458
 


하느님의
연약하심

자녀를 잃는 고통을 허락하시는 하느님의 뜻과
고통스러운 삶이 주는 의미


비토 크린콜리(Fr. Vito Crincoli, LC)신부

아이를 잃은 부모를 만날 때면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해 절망하곤 한다. 그것은 마치 주어지지도 않은 세계를 탐험하러 나서는 것처럼 느껴진다. 위로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신학생 시절, 멕시코에서 사목수련기 때의 일이다. 우리 청소년 클럽의 일원인 한 소년이 오토바이 사고로 숨졌다는 비보를 접했다. 막 14살이 된 소년은, 오토바이를 타기에는 너무 어리다는 끊임없는 어머니의 염려 한편으로 헬맷만 쓰면 괜찮을 거라는 삼촌의 말을 뒤로하고 생일선물로 받은 그 오토바이를 타고 나갔다.

그날 오후, 사거리에서 마주 오던 소형버스가 안전거리도 두지 않은 채 불법회전을 감행했다. 소년은 쓰러졌고, 버스 바퀴가 소년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헬맷은 으스러졌고 그는 즉사했다. 시신을 찾으러 달려간 가족과 지인들은 처참한 현실에 아연했다.

사람들로 붐비는 장례식장에서 가족과 친구들은 한결같이, 관 위에 놓인 푸른 눈의 사랑스런 소년의 사진을 보고 있었다. 내게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있어서, 그날 그 사람들의 모든 감정을 적을 수 있다면 족히 책 한 권을 엮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소년의 어머니와 애도의 뜻을 나누기 까지는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그녀는 길게 말하지 않았고, 개인적으로 어느 누구와도 대화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1년이 지난 후, 나는 앞서가던 그녀를 불러 세웠다. 비로소 우리는 한참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녀는 무시무시한 사건을 목격한 그 눈동자로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나?”고 물었다. 그녀는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나머지 하느님께서 벌주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아물지도 않은 상처를 성나게 할까 봐 듣고만 있자니, 내 자신이 더욱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그리고는 대화 말미에서야 겨우, 하느님께 화를 내는 것은 죄가 아니고 오히려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확신과 사랑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말해 주었다. 우리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화를 표출하게 마련이다. 그들만은 내 삶의 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여 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방식이다.

그렇지만, 이런 비극이 대체 무슨 유익을 낳을까? 우리는 유사한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해 안전관련법률을 강화할 것이다. 그 덕분에 다른 생명을 구한들, 그 어머니의 아들은 돌아오지 못한다. 이 사고가 살인행위와 같으며 살인자는 죽어 마땅하다는 판결이 나더라도 이 또한 죽은 아이를 살려 놓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대개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전능하심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된다. 하느님이 사랑이 넘치시고 위대하시다면, 생사가 엇갈리는 그 순간에는 왜 그토록 무력하셨나? 독재자가 돈과 권력을 위해 죄 없는 여자와 아이들의 생명을 빼앗을 때 어린 소녀들의 잔혹한 죽음을 어떻게 방관만 하셨나? 그렇다면, 하느님께선 이 참상을 못 보시는가? 악의 세력에 이토록 약하시단 말인가? 그 정도로 전지전능하지는 못하시단 말인가?

그러나,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결코 악의 근원이 될 수 없음은 우리도 잘 알고 있다. 실제로 하느님은 우리가 영원히 천국에서 살기를 바라셨다. 그런 하느님의 계획을 틀어지게 만든 것은 바로 우리였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창조하셨다. 이때 하느님께서 사랑을 보여주신 방식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것이다. 그분은 결코 뽐내지 않으신다. 우리를 절대적으로 신뢰하시기 때문에 자유로운 선택과 되어가는 그대로의 자연을 허락하신 것이다. 문제는 늘 이 지점에서 일어난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악에서 선을 이끌어내실 수 있다는 말을 들어왔다. 그럼 언제, 어떻게 하신다는 말인가?

전화로 소년의 어머니가 흐느껴 울며 애송하는 성경구절을 거듭 말한 적이 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고. 그날의 대화는 오히려 도움을 주려던 내 영혼을 더 풍요롭게 해 주었다. 그녀는 아들과의 행복한 추억들을 말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그녀를 사랑하시는 방식이며 항상 그녀를 위해 그 곳에서 함께 하시는 방식이었다. 그녀는 연이어 소년과 가까웠던 친구들과 소년이 소중히 여긴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녀의 삶에서 하느님의 존재를 일깨워 준 것은 결국 이들이라고 했다. 그들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그녀에게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이라고 확증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녀는 고통을 통해 하느님을 발견하기 시작했고, 더 잘 알게 되었다. 고통은 그녀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나아가 그녀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아이를 잃은 사람들에게 헌신하는 단체를 설립했다. 이후에도 많은 아픔을 겪은 이 여성은 이제 스스로를 ‘상처 입은 치유자’라고 여긴다. 하느님께서는 참상 앞에서 ‘연약’하지 않으셨다. 당신께서는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계셨던 것이다.

‘세상에 고통이 없다면 더 좋은 곳이 되지 않을까?’하고 생각해 본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그리스도 또한 같은 말씀을 하신 것 같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가게 해 주십시오(마태26,39)” 그러나 그것이 적절한 방식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계셨다. 그분은 인간이었다. 앞으로 겪을 고통이 두려웠으며 세상이 그의 극심한 고통을 외면할 것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다. 이렇게 무심한 세상을 구하려고, 그 엄청난 고통을 겪고 죽음을 받아들이셔야 했을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비극과 곤란에 직면했을 때 느끼는 고통을 똑같이 느끼신 것이다. 그렇다면, 고난을 어떻게 직면해야 하는지 깨닫는 순간 우리에게는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까? 삶의 과정에서 넘어졌더라도 교훈을 체득했다면 앞으로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고통은 우리의 한계를 볼 수 있게 해 준다’고 톨스토이는 말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때야 비로소 진정 우리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된다는 사실이다.

하느님의 약속은 지금 여기서 과연 어떻게 실현될 것인가?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삶을 통해 제 나름의 고통을 경험 하고 있다. 고통으로 꽉 잠긴 생명의 문을 어떻게든 열어야 한다. 열쇠는 바로 현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있다.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고 배신당하기도 하고, 평화를 지켜내지 못한 과거를 후회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개인적인 비극은, 정원사가 장미덤불의 가지들을 확 쳐냄으로써 아름다운 꽃송이를 피워내듯이 우리를 크게 성장시킬 수 있다.

고통의 이유는 우리가 그 고통을 겪어낸 후에야 알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시기 때문에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안심하자. 하느님은 우리를 내팽개치거나, 우리가 일생 동안 해결하지 못할 고통을 주지는 않을 분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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