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소식
연말로 접어들면서 2021년도 이미 저물고 있습니다. 올해는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있는 한해였습니다. 12월은 저희 수도회의 많은 신부님들의 사제수품 기념일을 맞이하는 달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단지 우연이 아니라 사제직과 성탄절의 깊은 관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사제는 또다른 그리스도(Sacerdos Alter Christus)이니 사제의 탄생과 그리스도의 탄생은 불가분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지난 6월에 부제품을 받았고, 승인이 될 경우 내년 5월에 사제서품을 받을 예정입니다. 제가 부제품을 받기 전에 3일 피정을 했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구절(요한 13, 1-20)을 여러 번 묵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봉사하셨듯이 이웃에게 봉사하는 사명을 받은 부제에게 있어서 중요한 구절입니다. 3일 피정과 부제 서품식을 잘 마친 후에 저는 신학생들의 공동체를 떠나 신부님들의 공동체에 합류했습니다. 신학교에 있을 때는 선배였는데 새 공동체에 오니 막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제가 먼저 나서서 움직이려고 노력합니다. 사실 저한데 의무적으로 주어진 일은 적은 편인데, 기회가 생길 때마다 제가 먼저 나서서 봉사하려고 하다보니 점점 바빠지고 때로는 봉사의 핵심인 사랑의 마음을 잊어버리고 외적 봉사에만 치중할 때가 있기도 합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제가 부족하다고 느끼기도 하고, 반면에 우리 공동체의 신부님들의 좋은 모범을 보면서 배우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공동체에서 제일 연세가 많으신 어느 아일랜드 신부님께서는 예우를 받으시면서 편하게 쉬셔도 되실 덴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쁘게 자발적으로 공동체를 도우시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그리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저에게 친밀하게 대해주십시다. 베네딕토 수도회의 모토인 ‘기도하며 일하라’(Ora et Labora)는 구절에 비추어볼 때, 수도생활을 하면서 아무리 열심히 외적으로 봉사를 하더라도 기도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진정한 봉사는 사랑과 희생이 동반되야 된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훌륭한 신부님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사제의 성소에 대해서 묵상해 봅니다. 사제는 이웃을 사랑하고 봉사하라는 부르심을 받았고, 사랑과 봉사는 희생을 동반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제는 최양업 신부님처럼 땀의 순교자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적으로 봤을 때 사제서품을 받으면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니 생활이 더 편해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왕중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미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다가오시는 모습을 묵상해보면, 진정한 사제직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닌 섬기고 희생하는 것, 즉 사랑을 실천하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마태오 20, 26-28).
섬기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주님께서는 사제들뿐만 아니라 평신도들에게도 모범이 되어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새 계명인 사랑의 계명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지상에서 실천한 사랑이라는 업적밖에 없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영성수련”에 의하면, 사람은 하느님을 찬미하고 공경하며 봉사하기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즉 인생의 목적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며, 이것은 성탄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서양에서 흔한 성탄 풍습 중 하나인 선물교환입니다. 이 관습을 통해서 가족간, 이웃 간에 사랑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선물교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외적인 선물을 넘어서 우리의 존재자체가 이웃에게 선물이 되어야 합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에게 자기자신을 선물로 내어주는 것이라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사랑의 실천은 각자의 가정에서 시작됩니다. 잘 아시듯이 성탄은 서양의 전형적인 가족 명절 중 하나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족 명절이라고 하면 성탄보다는 설날이나 추석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카톨릭 신자의 관점에서는 성탄과 가족을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가정 축일을 성탄 팔일 축제안에 지낸다는 사실이 이것을 보여주며, 올해의 경우 성요셉의 해를 지냈으니 더욱 의미가 깊습니다. 이번 성탄을 계기로 우리들의 가족에 대한 사랑의 모습을 성찰해보면 유익할 것입니다. 우리가 외적인 면에 치중하고 내적으로 깊은 사랑이 부족할 때가 있지 않았는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 바오로의 사랑의 찬가(코린토 1서 13장)에서 묘사하는 사랑, 즉 상대방에게 겸손하고 인내심있게 대하고 성을 내지 않으며 모든 것을 덮어주는 사랑을 실천했는지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진정한 사랑을 터득한 사람은 가족간에 자주 일어날 수 있는 온갖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성가정의 생활도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성 요셉께서는 성모님께서 동거하기도 전에 임신하신 것을 아셨지만 덮어주려는 마음에서 조용히 관계를 끊으려고 하셨습니다. 임신중에 낙타를 타고 베들레헴으로 긴 여행을 가셔야 했던 힘든 상황에서도 성모님께서는 불평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잃어버리신 성 요셉과 성모님께서는 서로의 잘못을 탓하지 않으셨고 만사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보셨습니다.
성가정의 모범을 따라서, 서로 봉사하고 사랑하는 거룩한 가정을 이루시는 성탄절과 새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가정사에는 온갖 종류의 위기가 담겨 있지만, 여기에는 가정의 극적인 아름다움도 있습니다. 극복된 위기는 강렬함이 줄어든 관계를 이끌어 내지 않고 오히려 유대라는 포도주를 더 좋게 만들고 안정시키며 숙성시켜 줄 수 있습니다. 함께하는 삶은 그들의 만족감을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증진시켜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사랑의 기쁨, 232항)